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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수월선사

음관수월선사音觀水月禪師

수월 선사水月禪師는 경허 선사鏡虛禪師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만공滿空 중 맏이로,
경허 선사께서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하셨다.

선사는 18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29세 되던 해 경허 스님의 친형인 서산 천장암 주지 태허성원v太虛性圓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나,
글을 배우지 못하여 땔나무를 해 오는 부목負木과 공양주 노릇을 하다가, 어느 날 법당에서 예불 중
천수다라니를 듣고 바로 외워 나무를 하거나 밥을 지을 때 일심으로 암송하였다.

하루는 성원 스님이 밖에서 일을 보고 절에 들어오는 길에 물레 방앗간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물레 방아에 물이 세차게 떨어지고 있건만 방앗공이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자세히 보니
수월 행자가 방아통 속에 머리를 박은 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재빨리 수월 행자를 끌어내자마자 방앗공이가 다시 방아를 찧기 시작하는 신기한 일을 목격하였다.

그 후 수월 행자에게 사미계를 주었고, 그해 어느 날 성원 스님이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가다리고 있었는데 오지 않아 이상히 여기고 공양간에 가보니 밥 타는 냄새가
진동한데 수월 스님은 442자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었다.
삼매에 드신 것이다. 이를 본 스님이 “오늘부터는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을 하지 말고 방을 하나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 기도를 해보라.” 하니 가마니 한 장을 가지고 방문 안쪽에 걸어 빛이
못 들어오게 해 놓고 밤낮으로 대비주를 독송하는데, 일주일이 되는 날 문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잠을 쫓아냈습니다.” 하시면서 춤을 추었다. 그날 밤 천장암 아랫마을 사람들이 천장암 근처에
붉은 불기둥이 일어나 환히 밝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의 몸에서 나오는 방광放光이었다.
이때 수월 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이루어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염지 不忘念智를 증득하셨고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신통神通을
얻으셨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도 읽지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못하셨지만, 이후부터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봐도 막힘이 없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들의 이름도 한번 들으면 외우셨다고 한다.

1986년 지리산 천은사 선원 상전암의 토굴 우번대에서 정진하실 때에도 자주 방광하시어 지금도
마을 이름이 방광리라 불리고 있다. 그 후로 수많은 방광(放光)과 이적(異蹟)으로 자비행적(慈悲行蹟)을
나투시면서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조실로10년간, 오대산상원사, 순천정해사, 황악산직지사,
지리산천은사 상선암, 화엄사, 쌍계사칠불암 등에서 유행교화流行敎化하시며 경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묘향산 중비로암, 천마산사복사, 회령백천사, 만월산 월명사 등에서 보림과 교화의 행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국운(國運)은 날로 쇠퇴(衰退)하여 일제(日帝)의 침략수탈(侵略收奪)이 극極에 달하자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만주로 도피逃避할 때에 스님께서도 야인野人의 모습으로 러시아 국경 지역
흑룡강성 수분하의 고려묘지가 있는 지역에 고려사를 지어 타국땅에서 외롭게 숨을거둔 동포들의
애환을 달주기도 하셨으며 도문시 일광산 일광사에서 독립군의 치료治療와 식량제공에 전념(專念)
하시고 길림성 연길 희막동에 토굴을 짓고 소먹이를 하시며 독립지사들을 구제하는 일로
삼여년三餘年을 지내시다가 세수(世數) 육십세에 수분하의 고려사에서 육년, 나자지구 송림산
화엄사에서 육년간 제자를 가르치며 중생구제 (衆生救濟) 보살(菩薩)의 자비행을 베푸셨다.

스님이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에 있는 관음사에서 6년 동안 신분을 감추고 한 젊은 스님과 함께
계셨는데, 우연히 머물게 된 독립군에게 “그 스님이 내게 무신 행패를 부리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나는 한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어. 나는 그런 내 보림 생활이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던겨.
그러니 그 젊은 스님이 내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단 말여.”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라, 오직 이 마음
하나 비우면 그만인겨. 세상에서 마음 비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게 없어 또 참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고.” 하시며, “자네는 뒷날 꼭 중이 되고 말겨, 중이 되더라도 딴 생각 하지 말고 아는 척하지
말고 어리석게 열심히 공부만 해라. 공부는 보림이 중요한 법이여.” 하셨단다.

물론 그 독립군은 나중에 중이 되었다. 스님은 지금의 연변과 흑룡강성의 두만강 가의 일광산
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항일투쟁을 하는 독립군들과 실향민들 에게 밤이면 짚신을 삼아 나무에 걸어
놓고, 날이 밝으면 소를 키우며 주먹밥을 지어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시는 보살행을 하시며,
산 짐승과 날 짐승과도 놀아 주시고 때로는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셨다 한다.

그 당시 금오. 효봉. 청담 등 많은 선지식들이 목숨을 걸고 험난한 길을 찾아왔다. 청담 스님도 3개월
여간 스님 과 함께 하셨는데, 김밥과 짚신을 싸주시며, 자꾸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하셔서 마지막 절을
올리자, 스님은 청담에게 곳간에 있는 괭이를 가지고 오게 한 다음 바로 눈앞 마당에 박혀있는
돌멩이를 확 쳐내 버리시고 뒤도 안 보고 들판으로 나가신 것이 스님과의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청담 스님은 스님이 주신 이 화두 話頭를 수행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이것은 깨친 도인만이 보여 주실 수 있는 무언無言의 사자후獅子吼이다.

그 일 년 후 스님은 1928년 7월 16일 세수 74세 법랍 45세로 간도 수분하의 한 계곡 바위에
알몸으로 짚신을 머리에 이고 좌탈입망 하셨는데,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일제시 발간된
불교잡지(불교지 55호)에 의하면 화장시 주야로 7일간 방광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당시 아침에
보니 눈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가신 발자국들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스님의 법문

“사람 몸 받았을 때 성불하라!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것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엇을 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주문을 외든지, ‘하늘 천 따 지’를 하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옛 세상에는
참선을 해서 깨친 도인들이 많았는디 요즘에는 참 드물어. 까닭이 무엇이여?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했으면 누가 와서 화두 참선을 물으면 ‘나는 모른다’며 끝까지 가르쳐 주들 않았어.
깨친 도인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를 찾아 바로 알려 주시거든. 한 생각으로 마음을 몰아붙여
오로지 한길로만 애쓰다가 도를 통하기도 했어, 염불을 열심히 하여야 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겨. 또 ‘한 집안에 천자 네 명 나는 것보다 도를 깨친 참스님 한 명 나는 게 낫다.‘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그 공덕으로 모든 조상 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離苦得樂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참으로 사람 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 가지고도 참나를 알지 못하고 참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겨. 부처님께서도 ‘나도 너를 못 건져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
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뵈라 다 쓸데없다.”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차신불향금생도此身佛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사람 몸 받기 참으로 어렵고 불법 만나기란 더욱 어려운데
이 몸 받았을 때 깨쳐 불도를 못 이루면 어느 생에 다시 사람 몸 받아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겠는가?

경허선사와 선문답

수월이 갑산 도하리 경허선사가 서당에 계시는 문밖에서
“스님” 하니
“누구요”
“수월입니다”
문을 닫은체 “모르오” 하시니 수월이 댓돌 위에 짚신을 정성껏 삼아 올려 놓고 사제師弟로서 말없는
말로 보은報恩 하신 후 스승의 곁을 떠나신지 2년후에 경허선사는 1912년 3월25일 박난주라는
속명으로 열반에 드셨다.

만공스님과의 선문답

수월과 만공이 천장암에서 함께 공양을 하시던 중 수월은 갑자기 숭늉이 들어있는 물그릇을 들어
보이시며 만공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여보게 만공”
“이 숭늉그릇을 숭늉그릇이라 하지도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 하지도 말고 한마디 똑바로 일러 보시오”
그러자 만공이 숭늉그릇을 받아들고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문밖으로 던져 버린후 묵묵히 앉아 있으니
수월은 손뼉을 치며 “참 잘하였소” 하시며 선문답의 진수를 보이시고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