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음관대조사유적비 (水月音觀大祖師遺跡碑)
(29. 수월음관대조사)
선지식(善知識)의 행적(行蹟)을 범부(凡夫)가 짐작(斟酌)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거늘 수월음관(水月音觀)스승의 (行蹟)을 더듬어 찾아보기란 더욱 그러하다.
철종육년(哲宗六年) 단기 사일팔구년(檀紀四一八九年_) 병진 유월 오일 (丙辰 六月 五日) 충남 홍성에서 전씨손(全氏孫)으로 태어나 이십 구세가 될 때까지 주경삼매(晝耕三昧)하시더니 문득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함에 접하시고 천장사(天藏寺) 태허성원(太虛性圓)에게 출가(出家)하여 만공(滿空) 혜월(惠月)과 함께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삼대제자(三大弟子)가 되었다. 그후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수행(修行)하여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삼십삼세(三十三歲)에 대오(大悟)하여 불망념지(不忘念智)를 득(得)하시니 경허선사(鏡虛禪師)에게서 수월(水月)이란 법호(法號)를 수지(受持)하시었다.
그 후로 수많은 방광(放光)과 이적(異蹟)으로 자비행적(慈悲行績)을 나투시면서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조실, 오대산상원사, 순천정혜사, 황악산 직지사, 지리산천은사 상선암, 화엄사, 쌍계사칠불암 등에서 유행교화(流行敎化)하시며 경허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묘향산 중비로암, 천마산자복사, 회령백천사, 만월산월명사등에서 보림(보림)과 교화(敎化)의 행각(行脚)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국운(國運)은 날로 쇠퇴(衰退)하여 일제(日帝)의 침략수탈(侵略收奪)이 극(極)에 달하자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만주로 도피(逃避)할 때에 스님께서도 야인(野人)의 모습으로 도문시 일광산 일광사에서 독립군의 치료(治療)와 식량제공에 전념(專念)하시고 회막동에 토굴을 짓고 소먹이 돌보시며 독립지사 구제하는 일로 삼여년(三餘年)을 지내시다가 세수(世壽)육십세에 수분하의 고려사에서 육년, 라자구 송림산 화엄사에서 육년간 제자를 가르치며 중생구제(衆生救濟)와 보살(菩薩)의 자비행을 베푸시다가 무진년(戊辰年) 단기(檀紀)4261(서기1929)년 수분하(綏芬河) 한줄기 물에 목욕하시고 바위에 앉아 초연(超然)히 열반(涅槃)에 드시었으니 이때가 세수(世壽) 칠십이세이셨다. 열반후(涅槃後) 다비시(茶毘時) 주야칠일간(晝夜七日間) 대방광(大放光)을 놓으심에 후학들은 스님의 높으신 법력(法力)앞에 머리 조아려 예(禮)를 올릴 따름이다.
수월음관스승 홀연(忽然)히 입적(入寂)하신지 올해로 일흔네해
후손들이 스님을 欽慕하는 마음 哀切하여 住錫하신 곳의 香氣를 일부라도 찾아 이제나마 表石이라도 남기고져 이 글을 올립니다.
二代 上座 申默言
三代 孫上座 金道川
四代 曾孫上座 朴明煽
等 華嚴門徒一同
佛紀 二千五百四十六年 十月 2002.10
[ ※출생년대 오기 : 철종6년=1855년=단기 4188년(4189) = 불기 2399년... 수월선사의
출생년도는 1854년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관련년도는 기록마다 약간의 오차가 있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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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월음관연정봉안)
수월당음관 대선지식께서는
충남홍성군에서 태어나시어 29세에 충남 서산군 천장암으로 출가,
당대 선맥을 이으신 경허대선사를 은사로 수계하였고 천수대비주를 용맹정진하시어 확철대오하셨습니다.
지리산 천은사, 상선암 등 제방선원에 조실로 계셨으며 특히, 금강산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실 때 제방에서 찾아온 발심 납자들과 근세 남쪽의 이름 있는 큰스님들을 제접지도하셨습니다.
수월대선지식께서는 금강산 마하연에 계시면서 많은 선의 일화를 남기셨으며
그 많은 일화가 지끔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 침략으로 인해 중국 흑룡강성 지역으로 망명길에 오른 조선족들의 굶주리고 배고픈
동포들을 도우며 안착시키고, 부상당한 독립군들을 치료하고 보살펴주면서 한국불교계의 33인중 한사람인 백용성큰스님과 은밀히 만나 우리나라 독립과 장래에 대하여 협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 국경지역 고려묘지가 있는 지역에 고려사를 지어 타국땅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주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와청현 송림산에 화엄사를 지어
7년간 납자를 재접 지도하시다가
1928년에 송림산 화엄사의 좌선바위이에서
안좌, 열반에 드셨습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일제시 발간된 불교잡지(불교지 55호)에 의하면
화장시 주야로 7일간 방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당시 아침에 보니 눈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가신 발자국들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로 보아서 수월대선사의 진면목을
보이셨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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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대선지식 손상좌 도천큰스님은
1910년 2월23일생으로 15세에
내금강 마하연에서 출가
수월대선지식의 상좌인
신묵언큰스님께 삭발상좌가 되어
10여년간 마하연에서 수행정진 하시다가
도광큰스님과 같이 마하연에서 정진하셨습니다.
그후 두스님께서는 내금강 표훈사로
내려와 표훈사에 계시면서
상호 서원 맹세 하기를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 수행도반으로
상호 탁마 용맹 정진하고
서로 상좌를 두어도 차별없게
도광스님 상좌가 도천스님 상좌요,
도천스님 상좌가 도광스님 상좌로 생각하고
형편대로 힘 닫는 대로 교육지도 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큰스님은 서울 매각사를 거쳐
부산 법어사 선원 동산큰스님 회상에서 정진중
도광스님 부친인 김우와 거사님의 요청으로
황매산 보광사를 창건하여 선원을 개설하고
청전강큰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재방선객을 재접 선풍을 진작 시키시다가
종단 정화 불사에 보광사
사부대중과 함께 크게 동참하였습니다.
1969년 지리산 화엄사로 같이 오셔서
화엄사 주지 도광큰스님을 도와서
퇴사일로에 있는 화엄사 가람을
중건 복원하고
정화불사의 3대 목표인
교육, 포교, 역경불사에 진력하셨습니다.
그후 도천큰스님께서는 제방선원을 거쳐
대둔산 태고사에 주석 하시면서
6.25사변으로 인하여 전소된
태고사 대웅전 외 10여동의 건물을
중건 하셨으며
도제 양성에도 진력히셔 많은 인재를 양성 하셨습니다.
평생 직접 일을 하신 수월대선지식의 가르칩의 행을
본받아서 이행 하셨으며
태고사의 대 중창주로 사부대중의 모범을 보이셨고
후세에 큰 귀감을 보이셨습니다.
지금도 주야로 불사에
몸소 직접 지게질을 하시는 등
수월대선지식의 가르침의 행을 하고 계십니다
또한 도천 큰스님께서는
지금도 제19교구 본사 화엄사 조실스님으로서
제방납자를 제접 지도하고 계십니다.
2007.6.18.-21 금강산순례탐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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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 큰스님 모시고 화엄문도 스님과 표훈사 주지스님, 총무스님과 같이 수월선지식 영정을 대웅전에 모시고 기념촬영.. 내금강 표훈사 반야보정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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