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음관 대선지식 영정 봉안 및 도천 큰스님을 모시고
제자들과 금강산 참배 (2007년 6월 18일 ~ 21일)
수월당음관 대선지식께서는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시어
29세에 충남 서산군 천장암으로 출가
당대 선맥을 이으신
경허대선사를 은사로 수계 하였고
천수, 대비,주를 용맹 정진하시여,
확철대오 하셨습니다.
지리산 천은사, 상선암 등 제방선원에서
조실로 계셨으며
특히, 금강산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실 때
제방에서 찾아온 발심 납자들과
근세 남쪽의 이름 있는
큰스님들을 제접 지도 하셨습니다.
수월대선지식께서는
금강산 마하연에 계시면서
많은 선의 일화를 남기셨으며
그많은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 침략으로 인해 중국 흑룡강성 지역으로
망명길에 오른 조선족들의
굶주리고 배고픈 동포들을 도우며 안착 시키고,
부상당한 독립군들을 치료하고 보살펴주면서
한국불교계의 33인(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백용성 큰스님과 은밀히 만나 우리나라 독립과
장래에 대해서 협의 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 국경 지역 고려묘지가 있는
지역에 고려사를 지어 타국땅에서 외롭게 숨을거둔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주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왕청현 송림산에 화엄사를 지어
7년간 납자를 재접지도를 하시다가
1928년에 송림산 화엄사의
좌선바위 위에서 안좌,열반에 드셨습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일제시 발간된 불교잡지(불교지 55호)에 의하면
화장시 주야로 7일간 방관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당시 아침에 보니 눈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가신 발자국들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로 보아서 수월대선지식의 진면목을
보이셨다고 생각됩니다.
수월대선지식 손상좌 도천큰스님은
1910년 2월23일생으로 15세
내금강 마하연에서 출가,
수월대선지지식의 상좌인
신묵언큰스님께 삭발상좌가 되어
10여년간 마하연에서 수행정진 하시다가
도광큰스님과 같이 마하연에서 정진하셨습니다.
그 후 두스님께서는 내금강 표훈사로
내려와 표훈사에 계시면서
상호 서원 맹세 하기를
우리가 성불할 때 까지 수행도반으로
상호 탁마 용맹 정진하고
서로 상좌를 두어도 차별없게
도광스님 상좌가 도천스님 상좌요,
도천스님상좌가 도광스님 상좌로 생각하고
형편대로 힘 닫는데로 교육지도 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큰스님은 서울 매각사를 거쳐
부산 범어사선운 동산 큰스님 회상에서 정진중
도광스님 부친인 김우와 거사님의 요청으로
황매산 보광사를 창건하여 선원을 개설하고
정전강큰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재방선객을 제접 선풍을 진작 시키다가
종단 정화 불사에 보광사
사부대중과 함께 크게 동참하였습니다.
1969년 지리산 화엄사로 같이 오셔서
화엄사 주지 도광큰스님을 도와서
퇴사 일로에 있는 화엄사 가람을
중건 복원하고
정화불사의 3대 목표인
교육, 포교, 역경불사에 전력을 하셨습니다.
그 후 도천큰스님께서는 제방선원을 거쳐
대둔산 태고사에 주석 하시면서
6.25사변으로 인하여 전소된
태고사 대웅전 외 10여동의 건물을
중건 하셨으며
도제 양성에도 진력하셔 많은 인재를 양성 하셨습니다.
평생 직접 일을 하신 수월대선지식의 가르침의 행을
본받아서 이행 하셨으며
태고사의 대 중창주로 사부대중의 모범을 보이셨고
후세에 큰 귀감을 보이셨습니다.
지금도 주야로 불사에
몸소 직접 지게질을 하시는 등
수월대선지식의 가르침의 행을 하고 계십니다.
또한 도천 큰스님께서는
지금도 제19교구 본사 화엄사 조실스님으로서
제방납자를 제접 지도 하시고 계십니다.
명선스님 :
00:10:48 ~
가서 수월스님 말씀하시길 좋아서 그렇게 하라고 하라고 했단말이야..
그래서 그 스님이 가서 나무를 해다가 저녁에는 불을때고 이러케 하시는데
사흘만에 보니까 밤에는 그때는 전기불도 그런게 방안이 캄캄해저 부엌이 부엌안이 헌해 거기스님들이 가보니까.
보니까 그 스님이 머리에서 방광을해 광명이 나와가지고 훤해 그랬단말이야 하 저스님이 아마 수월스님인가 모르겠다. 우리가 수월스님을 친견을 못해서 수월스님이 그렇게 방광을 많이 하시고 신통이
다재하시고 그런다드라 할적에 그러면 가서 물어보자 가서 스님 스님 혹시 스님이 수월 스님 아니요 하니까 그 스님이 할 수 없이 내가 수월이요 그러니까 그 스님들이 아주 참 그냥 팔을 잡고 그냥 모시고 큰방으로 가서 어간에 정면에다 모셔 놓고 저희들이 큰 잘못을 도인을 몰라보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면서입자 하고 삼배를 하고 이러케 못가시게 조실로 모시고 이제 못나가시게 그랬단 말이야 있는데 거기에는 또 아주 한단계 높은 스님들 부참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이여 그때 백용성스님 3.1독립선언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불교계에서는 백용성 한용운 두분이 있죠 백용성스님도 그때 입성을 보고 이었어 그때 그 얘기를 밑에 그 방장사는 선방 천운사에서 그랬다는 말을 듣고는 그냥 스님들이 하이구 수월스님을 친견하려고 해도 못하는데 아주 잘되었다 하고는 쫏아내서와서는 스님들이 모시고 위로 올라가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조실로 모시고 있었고 백용성스님은 입성을 보셨고 수월스님은 조실을 보셨어 그렇게 했다는 거기서 그 스님들이 거기서 이제 참 공부를 잘했고 한철을 지내고 가셨다는데 그 후에 몇십년 후에 김진태검사라는 사람이 학생일 때 옛날에는 학생들이 고시준비 하려면은 절에 가 있습니다. 지금에 일예 절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들어보니까 그런얘기를 들었거든 수월스님 아 그런 도인도 있구나 자기도 머리를 깍고 싶은데 이거 참 고시시험을 치르니까 고시도 합격해 버렸다. 그러니까 항상 마음에 수월스님에 대한 그 거시기 있어 항상 마음에 헐썩 고생해가지고 그러고 있으인데 책을 써야겠다 해가지고 그생각을 가지고있던 차재에 검사로 있으면서 쓸시간이 없거든요 자료수집도 해야되고 그런데다가 진수라고 내 상좌가 북경대학에 한 15년전부터 가서 여기 한국에서 동국대학 불교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하고 있었을 때입니다.그때 내가 그애가 중국말을 잘 하기 때문에 네가 중국말을 잘 하니까 수월스님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라 하고 내가 뒷받침을 해줬거든요 그래 잘 하라고 했더니 갔다가는 김진태검사 지금 오늘 강처사 라고 있거든 그 강처사가 배달은 형이여 근데 그 강처사가 진수 또 형이라 그런께 그 사람을 시켜가지고 김진태검사가 강처사 한테 원고을 쓰게 하고 진수는 자료을 그리로 줫어 그래 첫권이 나왔는데 조금 미진하다고 다음번에 또 한권이 나왔어 그랬는데 그리한지가 벌써 15년 되었습니다. 그때만해도 계속 이번에 그 수월스님에 대한 편견은 먼집이랑 같은 겁니다. 편견이란게 근거에 의해서 해도 정확하게 해야 되기 때문에 지금 10년이 넘도록 까지 쭉 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아주 수억을 들여서 그게 하고 있는데 나오라 해가지고 서울서 하고 있습니다.